- 교회의 바람직한 사회참여를 고민하다.
- 김강석 2023.2.7 조회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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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바람직한 사회참여
(3.1운동 이후, 한국교회의 동향을 거울 삼아)
1. 1920년 이후 교회의 방향성과 사회적 반응
3.1운동에서 기독교회의 역할은 지대했으며, 이후의 독립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지도적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많았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와서는 교회가 보수화, 내향화되면서 교회의 청년운동이 거의 사라지고,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교회가 특권층의 편에 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비판과 교인의 감소에 직면하여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여 ‘사회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술 담배 매춘을 금지하는 절제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입장은 계몽적이며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나름의 의미와 반향이 있었지만, 반면에 구체적인 사회, 경제, 정치적 현실을 포착하지 못하고 개인의 영적인 문제로 국한시킴으로써 핵심을 흐려놓는 결과를 초래한 면도 간과할 수 없다.
‘사회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사회복음(the Social Gospel)’으로 나타났다.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사회변혁의 과제를 선교행위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피안의 현실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가장 바람직하고 가능한 현실(성서적 원칙에 입각한 사회 변혁)’이었다
변화된 상황에 대한 또 다른 기독교적 대응은 ‘기독교와 맑시즘의 공통점을 찾는 것(기독교 사회주의)’이었다. 이대위(李大偉)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모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수가 사회 혁명가였음을 피력하면서, 한국교회가 사회주의 이론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단, 그는 맑시즘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자발적인 재산포기를 요구하는 민중주의적 사회를 주창했다. 조만식, 배민수, 유재기 등 당대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도 이대위와 마찬가지로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던 사회복음주의자들과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1920년대 말에 시작되는 기독교 농촌사업에 모두 합세했다. YMCA가 최초로 농촌사업에 착수했고, 그 뒤를 이어 장로교와 감리교가 농촌사업부를 조직했다.
그러나 기독교 농촌사업은 개량사업이지,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조선총독부에 의해 1933년에 시작된 농촌진흥운동과 차별성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결국 한국교회의 농촌사업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영에 협조한 꼴이 되고 말았다.
2. 사회주의 진영의 기독교 비판
한국교회 농촌사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중을 비주체적인 ‘대중’으로 보고 민중에게 시혜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민중의 필요가 아니라 교회의 필요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외면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의 비판은 사회주의적 경향의 잡지인 『開闢』을 통해 자주 발표되었는데 그 잡지 1925년 11월호에 종교에 대한 특집 형식으로 반기독교 운동에 관해 여러 편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이 글들은 종교 배척에 대해 자세히 싣고 있는데 종교 배척이 제1차로 우선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반대한다고 한 점이 눈에 뜨인다. 이 글에 의하면 이것이 조선에서 처음 있는 종교 배척이라 한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가 식자층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은 먼저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주구(走狗)”라는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침략의 선봉이요, 계급적으로 볼 때 자본가와 착취 계급을 옹호했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는 복종과 후세천당을 가르침으로 식민지 침략자들을 돕고 있다고 보았다. 이 외에도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지는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도피하게 해서 현실을 망각하게 한다는 것과 과학의 시대에 미신의 일종인 종교는 파산시대가 임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3. 비판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이와 같이 신랄한 비판을 받은 한국 기독교는 양면성을 띠게 된다.
첫 번째 부류는 교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와 보수적인 세력들로 이들은 사회주의에 대해서 극단적인 반대를 하면서 보수적 신앙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두 번째 부류는 진보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청년들로 이들은 사회주의의 반기독교 운동에서 교회의 변화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 두 번째의 진보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자본주의 비판에 일정 부분 동의했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는 반기독교적이며 인간성을 해치고(사회윤리적 입장에서의 비판),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며, 제국주의화 되어 전쟁을 일으키고 세계 평화를 해친다고 비판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 비판은 민족이 우선시 되는 일제 치하라는 것과 소박한 차원이나마 민중 계급을 중요시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너무 강요한 나머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거부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체로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1926-1928년을 제외하고는 민족 문제보다 계급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전체적인 민족해방운동에는 오히려 장애요소로 작용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보인다. 이것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서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정신을 토대로 삼아 그 정신을 구현하게 될 때 사회주의를 적대할 이유도 없으며, 그 유물론적 원리와 직접 행동적 방법은 불합리한 것으로 알기에 적대할 필요도 없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적 원리와 사랑의 실천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채필근 목사, 1885~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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