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말론적 신앙과 신학을 위하여(죽음너머 영원한 삶)
- 김강석 2019.8.19 조회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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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영, 죽음너머 영원한 삶- 종말론적 신앙과 신학을 위하여, 한들출판사, 2011)1. 종말론의 주제들
목회 현장에서 '종말론'은 뜨거운 감자와도 같다. 종말론의 주제에 대한 논의들은 깊어질수록 교파와 교단의 교리적 입장에 따라, 개인적 신앙의 노선에 따라, 또한 성서를 대하는 신학적 태도에 따라 논쟁거리들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들은 목회 현장에서 정면으로 마주하여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들이다. 죽음의 의미와 죽음 이후의 사후 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세상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 어느 것 하나 무겁고 논쟁적이지 않은 주제가 없다.
더욱이 종말론에 관한 신뢰할만한 책과 저술들은 대개 어려운 학술적 연구들이라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또한 너무나 많은 주장들과 논쟁들이 있기에, 어떻게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저자 최태영 교수는 오랫동안 신학교 강단에서 종말론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종말 교리와 신앙을 한국교회의 모든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학술적인 연구로 끝나는 서적이 아니라 교회에 실질적으로 유익이 되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합리적이면서도 성서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편안하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독자를 배려한 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이 책은 종말론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주제를 총망라하고 있다. 개인의 종말인 죽음의 문제로부터 역사의 종말, 나아가 우주의 종말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문제까지,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하나씩 설명해 가는 방법으로 서술하였다.
특히 종말론 주제에 관련된 난제들에 대해 학자들이나 각 교단적 주장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동시에 성서적 근거를 통하여 저자가 지지하는 분명한 입장을 통합적으로 정리해준다. 단언하건데 이토록 어려운 주제에 대하여 이토록 쉽고 명쾌하며, 균형 있게 설명하는 저술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 죽음과 부활
종말론이 다루는 범위는 크게 세 가지 영역이다. 개인적 종말론, 역사적 종말론, 우주적 종말론이다. 개인적 종말이란 죽음을 말한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은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있어 왔다. 장생불사를 추구했던 진시황, 영혼의 불멸을 믿는 그리스철학, 자연에 순응하여 죽음을 고귀하게 맞이하는 불교 고승들의 이해 등, 그러나 죽음에 대한 참된 극복은 죽음을 초월하는 삶의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죽음을 극복하는 주제에 있어서 탁월하다.
부활은 이 세상 삶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 영생의 시작이다. 기독교의 소망은 영혼의 불멸이나 윤회가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이다. 성서가 말하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있는 존재(全人)이며, 죽음에서 부활할 때에도 천국에 속한 새로운 몸을 입은 전인(全人)으로 부활하게 된다.
부활의 몸은 이 세상에서의 몸과 물질적 연속성은 전혀 없지만, 자기인식과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부활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부활체를 나의 몸이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3. 죽음 안에 있는 부활 사상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상당히 타당한 견해로 ‘죽음 안에 있는 부활’ 사상이 있다. 이 교리에 의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 이후에 곧바로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은 이미 부활했음에도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중간상태에 있게 된다. 즉 개인적인 종말과 부활을 경험한 자도 우주적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을 때에 곧바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잠자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부활하는 사람도 있다. 즉 죽은 성도에게 부활이 다 똑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죽음 안에 있는 부활을 경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비로소 부활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히11:35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라고 한 것은 부활 중에도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부활을 얻는 성도들은 순교자를 비롯한 의인들일 것이며, 또 어떤 성도들은 영혼수면론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잠자는 가운데 있다가 비로소 부활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있는 이 두 가지 형태의 부활을 그대로 보존하고 수용하는 것이 옳다. 확실한 근거 없이 하나로 통일하는 것은 위험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견해는 매우 성서적이고,신학적으로 타당하면서 교회에 유익한 교리이다.
죽음 안에 있는 부활론은 장례문화를 개혁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죽음에 대하여 훨씬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몸의 부활이 역사의 마지막 날에 가서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 곧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부활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4. 재림과 심판
재림에 대한 기대는 이생의 책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진시킨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에게 하실 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그리스도인답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재림신앙을 가지려고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재림의 지연(遲延)' 문제이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9:1)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막13:30) 이런 구절들을 근거로 임박한 재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여,재림의 실재성을 불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의도는 재림의 때를 알려주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다. 막13:30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사건을 예언하는 동시에, '재림의 임박성'을 말씀하려는 의도이다. 여기에서 임박성이란 시간적 임박성이 아니라,' 신앙 태도적인 임박성'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오히려 재림의 지연에 관한 말씀도 있다.(마13장의 비유들,마24:14,마25:5,마25:19,막13:7,눅19:11)
5. 그 외 종말론 영역들
천년왕국론은 종말론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성경을 얼마나 문자적으로 해석하는가에 따라 후천년설, 전천년설, 무천년설 등이 있으며 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무리한 문자적 해석이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저자 최태영 교수는 몰트만이나 김균진의 후천년설적인 천년왕국설은 현대의 윤리적 요청에는 부합하는 측면이 있지만 성서적 근거가 불충분함을 지적하며, 그보다 칼빈과 회커마 등의 무천년설을 지지함을 밝힌다.
천국과 지옥의 주제에 관하여, 천국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완전한 곳이며, 지옥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는 비실재 상태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자체가 가장 큰 형벌이요 고통이 될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형벌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인간이 그 상급이나 형벌을 받는 느낌은 전혀 다르게 된다.
반면, 몰트만은 만유구원론을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성품으로 볼 때, 심판은 최후의 단계가 아니라, 그 이후에 오는 마지막 최후 구원을 위한 회복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지옥의 영원성은 문자적인 영원이 아니라 상대적 영원(aeonisch)일 뿐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최후는 심판이 아니라, 그 이후에 있을 ‘만유 화해’이며,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미 만유구원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이중심판론을 지지하였다. 인간의 이해력으로 영원한 벌을 가혹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인정에 끌리기 때문에 저지르는 오류라는 것이다.
6. 종말론적인 삶
이전에는 신학계의 주된 관심이 되지 못했던 종말론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신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현대의 조직신학은 종말론을 교의학의 중심점으로 여기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종말론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미래에 대한 신학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위한 신학이다. 그것은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교리일 뿐만 아니라, 희망에 대한 교리이며,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기독교는 성도의 미래를 지극히 행복한 것으로 선포함으로써 현재의 삶에 의미와 소망을 제공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이다. 그런 의미에게 기독교 종말론은 소망론이다.
따라서 종말론은 순교적 삶을 가능하게 한다. 누가 순교적 삶을 살 수 있을까? 바른 종말론을 알고 믿는 사람이다. 바른 종말론은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게 한다. 삶의 가치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다.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가 궁극적인 것이며,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 길임을 알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이 세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고, 항상 순교적인 자세로 거룩하고 겸허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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